반도체 패키징 이야기에서 하이브리드 본딩은 몇 년째 “다음 세대에 온다”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범프를 없애고 구리를 직접 붙이는 기술이에요.

그런데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4는 결국 범프를 그대로 썼습니다. 기술이 안 됐기 때문이 아니라, 안 써도 되게 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범프로 띄운 층과 맞붙인 층 범프로 띄운 층과 맞붙인 층 — 출처: agy 생성

왜 범프를 없애려 했나

HBM(고대역폭메모리)은 D램을 여러 장 쌓아 만듭니다. 층과 층 사이를 잇는 게 마이크로범프 — 지름 수십 마이크로미터의 작은 납땜 구슬이에요.

문제는 셋입니다.

첫째, 높이

쌓을수록 두꺼워지는데 패키지 높이 규격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층을 늘릴 때마다 D램 한 장을 더 얇게 깎아 왔어요.

적층이 늘수록 얇아진 다이 적층이 늘수록 얇아진 다이 — 출처: 직접 작성 (분석 보도·업계 로드맵 기반)

HBM3 8단에서는 한 장이 55µm였는데, 같은 규격 안에 12단을 넣으려니 37µm까지 얇아졌습니다. 여기에 범프 높이가 층마다 14.5µm씩 더해집니다. 16단·20단으로 가려면 다이를 20µm 수준까지 깎고 층 사이 틈도 없애야 한다는 계산이 나와요.

둘째, 배선 수

HBM4는 입출력(I/O) 개수가 이전 세대의 두 배인 2,048개로 늘었습니다. 그만큼 연결 지점이 촘촘해져야 하는데, 범프는 열로 녹여 붙이는 방식이라 녹으면서 옆으로 퍼집니다. 간격을 좁히는 데 물리적 한계가 생기는 거예요.

이 숫자는 단수와 함께 불어납니다.

층 사이 접합 지점 수 층 사이 접합 지점 수 — 출처: 직접 작성 (I/O 수 기준 계산)

I/O 만으로 세어도 16단이면 층 사이 접합 지점이 3만 개를 넘습니다. 전원과 접지를 더하면 실제로는 더 많고요. 그중 하나만 틀어져도 그 묶음은 불량이라, 접합 하나의 성공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전체 수율이 무너집니다.

  • 적층 공정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부품 하나의 완성도가 아니라 수만 번을 연달아 성공해야 하는 문제예요.

셋째, 열

범프 사이에는 틈이 있고 그 틈은 열을 잘 못 보냅니다. 층이 쌓일수록 가운데 층의 열이 빠져나갈 길이 멀어져요.

더 쌓고 더 촘촘히 잇고 열까지 빼야 하는데, 세 요구가 전부 범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하이브리드 본딩이 하는 일

범프를 없애고 구리 패드끼리 직접 맞붙이는 방식입니다. 정확히는 구리와 절연막을 함께 붙여요 — 그래서 하이브리드(혼성)입니다.

붙이는 두 방식 붙이는 두 방식 — 출처: agy 생성

  마이크로범프(TC 본딩) 하이브리드 본딩
잇는 방식 납땜 구슬을 녹여 붙임 구리 표면끼리 직접 접합
층 사이 틈이 있다 틈이 없다
간격 좁히기 녹으며 퍼져 한계 미세 피치 유리
틈이 막는다 구리가 통로가 된다

효과는 열에서 두드러집니다. 공개된 검토 결과들을 보면 층 사이 열저항이 22.8~47% 줄고, 수직 방향 열전도가 최대 3배까지 올라갑니다. 실리콘에서 구리로 이어지는 연속된 열 통로가 생기기 때문이에요.

대신 요구 조건이 가혹합니다. 붙일 두 면을 원자 수준으로 평탄하게 갈아야 하고, 먼지 한 톨이 그대로 불량이 됩니다. 파운드리 쪽에서는 TSMC 가 SoIC 공정에서 6µm 피치까지 쓰고 있지만, 메모리처럼 수억 개를 싸게 찍어야 하는 물건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정밀도를 양산 수율과 원가로 감당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로직에서는 이미 4년째 쓰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하이브리드 본딩은 아직 안 나온 기술이 아니에요. AMD 의 3D V-캐시가 2022년 초부터 이 방식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CPU 다이 위에 SRAM 칩을 얹으면서 납땜 범프 없이 구리를 직접 붙였고, TSMC 의 SoIC 공정에서 당시 9µm 피치를 썼습니다. 2D 칩렛 방식과 비교해 연결 밀도가 200배라고 소개됐어요.

  로직(3D V-캐시) 메모리(HBM)
붙이는 칩 수 대개 두 장 12~16장
한 장당 값 비싸다 싸야 한다
실패했을 때 칩 하나 묶음 전체
  • 같은 기술이라도 몇 장을 얼마에 붙이느냐가 달라서, 로직에서 되는 게 메모리에서 바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HBM4는 범프로 갔습니다

당초 업계 예상은 HBM4부터였습니다. 실제로는 미뤄졌고, 이유는 넷으로 정리됩니다.

첫째, 규격이 느슨해졌다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이브리드 본딩을 밀어붙이던 힘은 높이 제한이었는데, 그 제한이 풀렸어요.

높이 규격이 완화된 흐름 높이 규격이 완화된 흐름 — 출처: 직접 작성 (규격·완화 논의 보도 기반)

HBM3E까지 720µm이던 패키지 높이가 HBM4에서 775µm로 올라갔고, HBM5 는 900~1000µm 수준까지 완화하는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 높이가 허용되면 다이를 무리해서 깎을 이유도, 층 사이 틈을 없앨 이유도 줄어듭니다. 기술을 미룰 여지를 규격이 만들어 준 셈이에요.

둘째, 열은 다른 방법으로 풀었다

하이브리드 본딩의 가장 큰 명분이 방열이었는데, 여기에도 대안이 나왔습니다. 삼성은 히트패스블록(HPB), SK하이닉스는 iHBM 처럼 열을 빼는 별도 구조를 붙이는 쪽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셋째, 16단을 아직 아무도 급하게 찾지 않는다

전환을 강제하는 건 결국 고객 수요입니다. 그런데 16단 제품을 두고 오가는 논의가 아직 활발하지 않고, 다음 세대인 HBM4E 에서도 12단이 주력으로 거론됩니다.

넷째, 장비 값이 다르다

공정을 바꾸면 장비도 바꿔야 합니다. 지금 HBM 적층에 쓰는 TC(열압착) 본더는 한미반도체가 점유율 71.2% 로 1위이고, 한화세미텍 등이 뒤를 따릅니다.

하이브리드 본더는 다른 장비예요. 업계 선두인 베시의 D2W 하이브리드 본더는 대당 50억 원 수준으로 거론됩니다. 국내에서는 한화세미텍이 D2W 하이브리드 본더 양산 준비를 마치고 2세대를 개발했고, 세메스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 한미반도체가 와이드 TC본더를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이브리드 본더보다 단가가 낮으니, 규격이 허락하는 동안은 기존 방식을 넓혀 쓰겠다는 선택이에요.
미룬 이유 내용
규격 높이 제한 완화
별도 방열 구조로 대체
수요 16단 수요가 아직 없다
장비 하이브리드 본더 단가 부담

삼성과 SK는 어디에 걸었나

두 회사의 선택이 갈린 지점이 여기입니다.

삼성전자는 2026년 2월 12일 업계 최초로 HBM4 양산 출하를 선언했고, 하이브리드 본딩 적용 여부를 두고는 시장의 관심을 계속 받았습니다. 장비사 쪽에서 “적용 여부는 2분기 초가 분수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판단이 늦게까지 열려 있었어요.

SK하이닉스는 최초 타이틀 대신 수율 안정과 공급 관계에 무게를 뒀습니다. HBM4 는 계획대로 공급하고 HBM4E 는 내년 양산이라는 로드맵을 유지했고요.

HBM4 시장 점유율 전망 HBM4 시장 점유율 전망 — 출처: 직접 작성 (시장 전망치 보도 기반)

2026년 HBM4 점유율 전망은 SK하이닉스가 절반을 넘고 삼성이 그 절반 수준으로 거론됩니다. 새 공정을 먼저 넣는 쪽이 반드시 이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국면이에요.

  • 신공정은 성능이 아니라 수율로 판정받습니다. 같은 성능이면 더 안정적으로 뽑는 쪽이 물량을 가져가고, 그 판단이 이번에는 “아직은 범프”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언제 오나

미뤄졌을 뿐 없어진 건 아닙니다. 현재 거론되는 지점은 HBM4E(16단) 부터이고, 늦어도 그다음 세대에서는 피하기 어렵다는 게 공통된 관측이에요.

높이 규격이 아무리 느슨해져도 층은 계속 늘고, 층이 늘수록 가운데 열은 더 갇힙니다. 결국 틈을 없애는 것 말고 답이 없어지는 지점이 옵니다.

신기술의 도입 시점은 기술이 완성된 날이 아니라, 안 쓰고 버틸 방법이 떨어진 날입니다.

참고 출처